구희선
일단 지금은, 엔지니어.
한동안은 바텐더였고,
간간히 카페 언니였고,
잠깐은 낙지집 서빙 아줌마였다.
그리고 아주 오래 학생이었다.
졸업을 하고 나니 디자이너가 되었고,
디자이너를 그만두니 엔지니어가 되었다.
번잡했던,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번잡할 이력들은
손쓸 도리가 없지만
그 간극에서 나는 여행자였으면 한다.
몇년만에 이 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대학 시절 지냈던 할머니 댁에서 회사 기숙사로, 회사 기숙사에서 지금 지내고 있는 전세집으로, 계속 나와 함께 거주 공간을 옮겨온 책이다. 짐을 최소한으로 꾸려 이사를 갈 준비를 하며, 기록 속에 남겨두고 책은 중고 서점에 보내줄 작정으로 집어들었다. 근데 왠걸, 책 첫장 작가의 소개 인사부터가 ‘나를 보내진 못할걸?’하며 나를 다시 매료한다.
카페 언니였다가, 낙지집 서빙 아줌마였다가, 아주 오래 학생이었다가, 디자이너였고 엔지니어가 된 그녀의 번잡한 이력이 마치 번잡해서 걱정이고 번잡해서 즐겁기도 한 내 모습과 닮은 것 같아서, 소개글만으로도 벌써 그녀의 글이 좋다.
7년 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내가 왜 좋아했는지, 왜 이따금 다시 꺼내 읽었는지, 좋아하는 친구에게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며 건넸었는지 다시 느낀다.
카페 주인 아저씨는 자꾸만 콩씨를 까주신다.
말이 안 통하니 콩씨가 유일한 소통 도구가 된다.
나는 자네에게 적대감이 없다네, 정도의 의사 소통.
사실 그것 말고 뭐가 더 필요할까.
나도 콩씨를 까드린다.
저도 아저씨한테 적대감이 없답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밝고 고요한 아침.
커피를 절반 정도 비우고 나니 차를 따라주신다.
콩씨에 이은 환대의 증거, 차가 졸졸 잔에 따라진다.
반 포기 심정으로 정원을 지나 로비로 들어가니 호텔 직원은 특유의 교육받은 미소를 가득 띄우고서 다가온다. 이봐, 그렇게 웃지 말라고. 미소에 화답하지 못할 내 지갑의 송구스러움이 자꾸만 표정을 딱딱하게 만든다.
새롭고 독특한 이야기는 아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 여행 얘기를 조곤조곤하게, 조금은 나른하기도 하게 써내려갔다. 분명 여행 에세이인데, 책을 반쯤 읽으니 친근하게 느껴지고, 궁금해지는건 작가이다. 여행지가 아니고. 여행 중 그녀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에,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글(표현)에 푹 빠져, 그녀와 그녀의 글을 궁금해한다. (다른 책이 더 있나 검색했지만 없다. 흑흑. 이제 엔지니어만 하시나요 작가님. 책 더 써주세요.)
박연준 작가의 책을 좋아한다. 잘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은 글이 그녀의 책에 가득해서. ‘1인분의 여행’을 읽으면서 박연준 작가가 떠올랐다. 따라적고 싶은 글들이 가득한 책을 쓰는 작가들이다.
그는 나보다 어렸지만 어딘가 매사에 너그러운 구석이 있었다. 너그러운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함부로 위로받는 기분이다. 동시에 조금 불편한 기분이다. 나의 너그럽지 못함이 자꾸만 티가 나서. 그것은 타고난 성품이거나 오랜 세월이 사람들에게 주는 장기근속상 같은 것이 아닐까. 참 오랫동안 삶의 출근 도장을 찍은 당신에게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하지만 세월은 나에게 넌 아직 멀었다 한다. '너그러움'이란 나에게 큰 위로인 동시에 언제나 자책할 거리가 된다.
서울에서 돈을 버는 일은 물론 쓰는 일조차 도통 즐겁지가 않았다. 사실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그건 사실 '즐거움' 같은 긴 호흡의 단어보다는 '쾌감' 같이 금세 사라지는 단어에 더 가까우리라.
육지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의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딱히 그녀 얘기를 했다기보다 그의 모든 얘기에 그녀가 배어 있었다. 9년의 시간이란, 그의 취미가 그녀의 취미가 되고, 그의 친구가 그녀의 친구가 되고, 그의 장소가 그녀의 장소가 되는, 그런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마 나는 이 책을 이번에도 보내지 못하고 이사 가방 한편에 잘 챙겨 넣어, 새로운 집 책장에 잘 꺼내놓을것 같다.

할 수 있는 만큼은 낭만적으로 살고 싶다.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으로, 국경을 넘는 버스 안에서, 내 시야에 끼어든 앞 좌석 사람의 깍지 낀 손에, 나는 아마 눈살을 찌푸리고는 다시 잠을 청했을것이다. 작가는 깍지 낀 손을 카메라에 담아와, 그녀의 책속에 옮겨 담았다. 마음 속에 그 정도의 낭만을, 그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다. 그러면 나도 바쁜 삶 속에 가려진 낭만적인 장면들을 조금 더 많이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낭만적인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너, 카우치서퍼니? 고객를 끄덕이니 롤랜드는 일이 생겨서 두어 시간 후에 돌아온다고, 수영을 해도 좋고 커피를 마셔도 좋고 편하게 기다리란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영복을 갈아입고서 바다로 뛰어든다. 좁은 버스 안에서 구겨졌던 몸이 슬슬 풀어진다.
바다로 뛰어드는,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당히 시원한 수영장에 퐁당 뛰어 들고싶어진다. 몇년 전 사랑스러운 수영장이 딸려있던 스페인 시체스의 숙소가 생각난다.

어멋, 내 얘기가 아닌가? 싶었던 이야기들.
손톱이 길 때 키보드를 누르는 걸치적거림이 싫어서 꼬박 꼬박 손톱을 깎는다(그래서 발톱 깎는건 자주 까먹나보다). 요술램프 지니가 나타나 100가지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한다면 그 중 한가지는 손톱이 더이상 자라지 않고 정갈하게 유지되는 것.(다른 한가지는 콧물 안나는거…)
가게에서 맥주 한 캔을 사고 쎄옴을 잡아 탄다. 그리고 쎄옴 뒷좌석에 앉아 멍하니 기사의 새끼 손톱을 본다. 새끼손가락 끝에서 긴 세월을 살며 꼬장 꼬장해진 그의 새끼 손톱.
손톱을 기르는 것에 대해 나는 일정한 불만감을 갖고 있다. 일단 그 행위 자체가 위생적으로 옳지 못한 것이 불만이고, 더러운 주제에 자꾸만 키보드와 나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것이 불만이고, 별것도 아닌 일에 발랑 까뒤집어지는 것이 불만이고
...
손톱을 버릴 때마다 쥐가 이것을 주워 먹고 내 행세를 하면 어쩌나 불안했고, 손톱 쥐와 나를 구분해주는 것이 뭘까 생각하다가 아무도 그 경계를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아 더 불안했다.
조근조근 얘기를 이어가다가 이따금씩 뱉어놓는 말을 소화시키듯 잔잔히 미소를 짓는 그의 방식이 꽤 멋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의도치 않게 수다쟁이가 되곤 하니까. 그렇게 쉴 새 없이 떠들다가 집으로 돌아 올 때면 왠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곧, 뭐라도 얘기하는 게 나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침묵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간혹 별말 없이 세상에 무심한 듯, 침묵으로 상대방을 관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과 마주하는 순간은 대부분 숨막히게 어색하지 않은가.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허망하게 흩어져 벼릴 의미 없는 수다와 상대방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침묵, 둘 중 뭐가 더 나을까. 그런데 이 남자가 만드는 침묵은 다른 어떤 요란한 환대의 말보다 다정하고 편안하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정갈하게 놓인 화초처럼.
"북반구와 남반구는 달 방향이 반대야."
그 말이 몹시도 근사해서 나는 좀더 오래 그와 얘기하고 싶었다. 그는 분명 무언가 다른 멋진 말도 알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들은 여행을 간다.
...
이왕 지구에 태어났으니 지구에 있는 나라는 다 가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왜 여행을 떠나는가에 대한 멋진 답변은 도무지 못 찾겠다. 그냥 낯선 곳을 가는 것이 그리고 그 낯선 곳에서 내가 낯설어지는 기분이 꽤 오랫동안 지겨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을 했고, 계속 여행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