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위화, 문학동네) _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표현하는 열 개의 단어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한참 중국어 공부 했을 때 중국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산 책.

산지 1년이 더 된것 같은데 조금씩 조금씩 읽다가 이제야 다 읽었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일년에 10번을 방문했어도 멀게만 느껴지던 중국이다. 책 속의 내용이 내가 궁금했던 중국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을 읽었다고 가깝게 느껴지진 않지만. 그래도 중국 사람을 만났을때, 그를 조금은 더 이해하며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위화의 눈을 통해 엿본 중국. 이방인이 관찰한 중국이나, ‘중국은 위대하다!’를 외치는 중국인이 서술한 중국이 아니고, 애정과 비판이 섞인 시선으로 중국을 서술했다. 그래서 나도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내 생각보다 더 보수적(보수? 중국스러움?)이어서 놀랐던 부분

  • 이 책은 프랑스, 미국, 한국, 타이완 등 여러 나라에서 번역 및 출간되었지만 중국 대륙에서는 출판이 불가능하다.
  • 작가의 첫 직업은 치과 의사였다(사실 치과 의사보다는 발치사. 하루 내내 발치만 했다). 이는 작가가 치의학을 공부했기 때문이 아니고, 국가에서 이 직업을 배정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중국에서는 개인에게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 작가가 초중학교 학창시절을 보낸 시기는 문화대혁명 시절이었는데, 작가가 위험 없이 접할 수 있는 책은 도서관에 있는 20여 종의 사회주의 혁명문학과, 집집마다 보유하고 있던 마오쩌둥 선집과 마오 주석 어록 뿐이었다. (‘춘희’라는 금지된 책을 구했을 때, 이 책을 하루뒤에 돌려줘야 해서, 친구와 하루 내내 필사를 하고 돌려주었다고 한다…대단쓰.)

문화대혁명은 문학이 없는 시대였다. 단지 국어 교과서에만 한 줄기 미미한 문학의 숨결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했던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의 교과서에는 단 두 사람의 문학작품만 수록되어 있었다. 루쉰의 소설과 산문 및 잡문, 그리고 마오쩌둥의 시사였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너무나 순진하게도 전 세계를 통틀어 작가는 루쉰 하나뿐이고 시인은 마오쩌둥 하나뿐이라고 믿었다. _ 루쉰 중 일부

당시 나는 이른바 독초로 불리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불에 타 없어지는 운명을 피한 이 문학의 생존자들이 우리 중학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나는 진정으로 문학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들이 이런 책을 조심스럽게 보존하고 있었고, 나중에 사람들이 대규모로 몰래 돌려 읽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책들이 수천 개의 손을 거쳐서인지 내 손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심하게 낡은 상태였다. 앞부분의 10여 쪽 정도가 찢겨 나간 책도 있었다. 당시에 내가 읽었던 이들 독초 소설들 가운데 상태가 온전한 것은 단 한 권도 없었다. 나는 책 제목도 몰랐고 작가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끝나는지도 몰랐다. _ 독서 중 일부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문학이 돌아왔다. 서점에는 참신한 문학작품들이 가득했다. 그 시기에 나는 아주 많은 외국 소설을 사서 읽었다. 그 가운데는 『여자의 일생』이라는 소설도 있었다. 프랑스 소설사 모파사으이 작품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침대에 엎드려 『여자의 일생』을 읽기 시작했다. 3분의 1쯤 읽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알고 보니 바로 이 책이었다! 내가 여러 해 전에 가슴을 졸이며 읽었던 시작도 끝도 없었던 첫번째 외국 소설이 바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었던 것이다. _ 독서 중 일부

이전에 쓴 글 말미에서 나는 나의 독서 이력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매번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따라 어디론가 갔다. 겁 많은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그 작품의 옷깃을 붙잡고 그 발걸음을 흉내 내면서 시간의 긴 강물 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아주 따스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여정이었다. 위대한 작품들은 나를 어느 정도 이끌어준 다음, 나로 하여금 혼자 걸어가게 했따.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나는 그 작품들이 이미 영원히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_ 독서 중 일부

2009년 2월, 내가 밴쿠버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연을 하며 2006년 중국에서 연간 수입이 800위안밖에 안 되는 빈민 인구가 1억명에 달한다고 얘기하자 한 중국 유학생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돈은 행복을 가름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이 중국 유학생의 한마디를 듣자 나는 몸이 떨려왔다. 이는 한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오늘날 일부 중국인 집단이 내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날이 발전하는 중국의 이미지에 푹 빠져 아직도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가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나는 중국인의 진정한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빈곤과 기아보다 더 무 서운 것이다.

중국은 지난 30여 년 동안 세계가 주목할 만한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30여 년 동안 9퍼센트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했고 2009년에는 이미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경제대국이 되었다. 2010년 중국의 재정 수입은 8조 위안에 달하고 관계 기관들은 자랑스럽게 중국이 미국에만 뒤지는 세계 제2의 부국이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영광스러운 통계수치의 이면에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수치가 또 하나 있다. 국민들의 연평균수입이 여전히 세계 백 위라는 사실이다. 서로 비슷하거나 평형을 이루어야 하는 이 두 가지 경제지표가 뜻밖에도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너무나 큰 차이로 벌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통계수치는 오늘날 우리 중국인들이 균형을 잃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민간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국가는 부유하고 백성은 가난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중국에서는 1958년의 대약진운동 시기에 전국의 인민을 대대적으로 철강제련에 동원했다.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초월해야 한다는 구호 아래 전국 도시의 마당과 농촌의 들판에 소형 용광로가 설치되었다. 중국의 대지 전체가 뜨겁게 타올랐고 중국의 하늘이 짙은 연기로 뒤덮였다. 농민들이 농업활동을 제쳐두고 각지로 철광석을 찾아 헤맸다. 철강을 제련하는 동안 다 익은 대량 농작물이 들판에서 썩어나는데도 이를 수확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시의 노동자들도 자신의 본업을 포기했고 제약공장 노동자들도 철강제련에 동원되었다. 견직공장 노동자들도 철강제련에 나섰고 학교 선생님이나 학생들도 철강제련에 동원되었다.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도 철강제련에 나섰다. 그 시대에는 누구나 ‘대약진 소극분자’로 간주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모두가 철강제련에 참여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_ 혁명 중 일부

마오쩌둥이 실패한 대표적인 정책 2가지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고 한다. 대약진운동은 단순한 실패 정책을 넘어서 국민 학살이라고도 여겨진다. 대약진운동때 수많은 인민이 사망했다.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이었으며 그 숫자는 제2차 세계대전 사망한 사람의 수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의 숫자를 합한것과 비슷하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내 과거 기억 속의 해답은 온갖 주장들로 뒤죽박죽이었다. 혁명은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았고 어떤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유대도 혁명을 따라 수시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늘까지 혁며으이 전우였던 사람이 내일은 계급의 적이 될 수 있었다. _ 혁명 중 일부

극도로 격렬했던 중국의 정치운동에서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거리는 한 걸음밖에 되지 않았다. 민간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샤오빙(밀가루 반죽을 넓적하게 만들어 프라이팬에 구운 음식)을 뒤집는 것처럼 역전하기 쉬운것이 혁명과 반혁명이었다. 그 시대에 사람들은 화덕의 벽에 달라붙은 샤오빙에 지나지 않아 운명의 손에 얼마든지 뒤집혔다. 어제는 혁명가였다가 오늘은 반혁명분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또한 오늘은 반혁명분자였다가 내일이면 혁명가로 변할 수도 있었다. _ 풀뿌리 중 일부